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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건14 (하랑, 마틴, 티엔)사이퍼즈 2015. 11. 8. 00:23
[사이퍼즈]
출연 : 하랑, 마틴, 티엔 정.
조건 : @Riel_Twl 님의 #연성소재 –저승사자는 사자에 대한 마지막 예의로 살아생전 그 사자가 가장 사랑했던 이의 혼을 잠시 빌려와 인도한다. 살아생전의 말투와 기억, 행동과 표정까지 사랑했던 이의 모습으로, 말 그대로 마지막 만남이 되는 것이다-를 토대로.까만 갓을 쓰고 도포를 입은 긴 머리의 청년이 퀭한 눈으로 손에 쥔 명부를 훑는다. 오늘 그가 인도할 영혼은 이로써 마지막이다.
“하랑 군. 부탁 하나만 드려도 될까요?”
빌어먹을 것이 제 일을 떠넘기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사내, 하랑은 일주일 내내 자신을 선잠만 자게 만든 두툼한 명부를 소리 나게 덮으며 눈을 치켜떴다.
“또 기가 세서 힘들다는 둥 발이 너무 빨라 잡을 수가 없다는 둥 개소리하기만 해봐.”
서슬퍼런 그 눈을 마주하게 된 마틴은 난감하게 웃었다.
“하하하……. 기가 센 것도 있지만요, 하랑군 이번엔 정말 제 힘으론 역부족이라서 그래요. 도무지 속을 읽을 수가 없어서. 저로선 이 사자를 인도할 수가 없는걸요.”
이번에야말로 정말이라는 듯 말하는 그의 모습에 하랑은 같잖은 변명을 듣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를 외면했다가 돌연 멈칫했다.
“속을 읽을 수가 없다고?”
“네. 머릿속을 읽을 수가 없어서, 능력으로 억지로 끌고 오려다가 한 대 거하게 맞고 쫓겨났다니까요. 아야, 아파라.”
하랑의 물음에 마틴은 답을 하다말고 움찔하며 눈가를 매만졌다. 하랑은 그제서야 마틴을 제대로 돌아보았다. 지금껏 푹 쓰고 있던 마틴의 모자가 벗겨지고 그 자리엔 시퍼런 멍이 드러나 있다. 벙 찐 하랑의 모습에 마틴은 어색하게 웃었다.
“부탁해도 될까요? 하랑군.”
[섣달 그믐날까지는 모든 사자들을 꼭! 인도하여주시기 바랍니다. 아시겠죠?]
“아이씨, 진짜.”
하랑은 거절하고 싶었지만, 날 서린 염라대왕의 음성이 자꾸만 귓가를 울려 결국 그 부탁을 수긍했다.
“그래서, 누군데 그 망할 영혼은.”
하랑은 짜증을 숨기지 않고 내뱉으며 풀어헤친 머리를 쓸어 넘겼다. 어깨를 훨씬 넘긴 그의 까만 머리칼을 바라보며 마틴이 답했다.
“티엔. 티엔 정. 무공이 상당한 경지의 사내인데, 며칠 전 생명의 끈이 급작스레 다하였지뭔가요. 이런 경우는 드문데 말이에요.”
티엔 정. 아시아계열 사람인가. 하랑은 미틴의 말을 들으며 피곤한 눈을 꾹 감았다 떴다. 가라앉아있던 붉은 개의 혼이 하랑의 눈 어귀에 머물다 사라진다.
“알았어. 네 녀석이 그 꼴이 된 걸 보면 어떤 놈인진 잘 알 것 같네.”
멍청하리만치 제 고집만 들입다 센 녀석이겠지. 하랑은 속으로 중얼거리며 마틴의 어깨를 가볍게 치고 걸음을 뗐다. 그 속엣 말을 들었는지 마틴이 작게 웃음을 지었다.
“다음에 밥이나 한 끼 사셔.”
하랑은 걸음을 떼며 그를 향해 대충 손을 흔들었다.
“그럼요. 무사히 다녀오시면 5성급으로 대접할게요.”
하랑은 마틴의 농담 같지 않은 말에 실없이 웃었다. 뭐, 그러시든지.
저 놈인가. 하랑은 두 눈을 게슴츠레 뜨며 까만 머리칼의 사내를 찬찬히 살폈다. 자신과 같은 머리색. 그리고 까만 눈동자. 유의 깊게 그를 바라보던 하랑은 일순 그대로 굳었다.
“설마. 날 본 건 아니지?”
그리고 그렇게 중얼거림과 동시에 하랑의 시야에서 사내가 사라졌다. 하랑은 흠칫하고 이리저리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아무리 찾아봐도 사내는 보이지 않는다. 하랑이 당황한 표정으로 입을 뻐끔거리던 그 때, 그 귓가에 서늘한 음성이 드리운다.
-누구냐.
중국어? 아니, 그보다……. 한 마리의 호랑이가 바로 등 뒤에서 으르렁거리는 듯한 위압감이다. 잡생각보단 먼저 생사의 위협부터 들 정도로! 하랑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목 언저리에 닿은 새카만 손은 금방이라도 하랑의 목을 잡아 단박에 꺾어버릴 것만 같았다. 하랑은 굳은 고개를 천천히 움직여 소리가 들려온 쪽에 시선을 주었다.
분명 새까만 눈이건만, 푸르스름한 무언가와 정면으로 마주친 느낌이 들었다. 하랑은 무심코 잠재되어있던 기운을 끌어올려 본능적으로 제 몸을 보호했다. 덕분에 붉은 기운이 순식간에 하랑의 주변을 감싼다. 뻣뻣하게 긴장된 몸을 움직여 하랑은 서둘러 그에게서 떨어졌다.
아니, 떨어지려했다. 일순 들려온 음성에 하랑은 몸을 일으키던 그대로 망부석처럼 굳어버렸다. 잘못 듣지 않았다면 분명.
-하랑.
분명, 그렇게 말했다. 하랑은 멈춰선 그대로 돌아가지 않는 머리로 생각해보았다. 자신이 지금 모습을 변모한 적이 있던가. 아니. 그럴 정신도 없이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저 도망가려고 하지 않았던가. 하랑은 다시 한 번 마주친 그 까만 눈동자에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다.
서슬 퍼렇던 눈매가 치떠지며 차갑게 굳어 있던 사내의 얼굴이 무너지고 닫혀 있던 그 입술이 서서히 벌어진다. 그리고는 옅은 음성으로 ‘하랑’이라 불렀다.
하랑은 거기까지 되짚어보고는 크게 숨을 삼켰다. 하랑. 그 이름을 이 사내가 어찌 알았지? 혼란스레 제대로 잡히지 않던 시야가 들어오고, 곧이어 온전하지 못한 사내의 모습이 눈에 든다. 그래. 마지막 미련을 털어내어 드디어 인도되어지는 사자의 모습. 그러니까 말인 즉슨, 그 영혼이 서서히 사라지며 성불하고 있다는 말이다. 하랑은 멍하니 입을 뗐다.
“잠깐.”
그러나 이미 시작된 사자의 인도는 멈추지 않는다. 잡지 못하니 더욱 빨라지는 것만 같은 착각이 들어 하랑은 다급히 손을 뻗었다.
“자, 잠깐. 이봐!”
얼마나 급했는지 목소리가 뒤집힐 것만 같다. 그러나 그가 급한 것과는 별개로 사내의 영혼은 벌써 가슴께까지 사라진 뒤였다. 내뻗었던 하랑의 손이 하릴없이 허공을 휘젓는다. 하랑은, 울컥하여 소리쳤다.
“정 티엔!”
여지껏 멍하니 있던 영혼이 그제야 반응한다. 어딜 보는지 흐릿하던 눈동자가 곧게 하랑을 향하고, 이내 슬쩍 입가에 웃음을 띠었다. 천천히 열리는 그 입술에 하랑의 시선이 고정됐다.
-드디어…….
그리고 그 모든 영혼의 흔적이 사라질 때까지 하랑은 그 자리에서 움직일 수 없었다.
흩어지던 사내의 음성이 하랑의 귓가에서 끝없이 맴돈다. 얼핏 따스함이 깃든 그 음성에 하랑은 생소한 감정이 들었다. 여느 때완 다른 느낌이었다. 알 수 없는 혼란에 하랑은 손을 들어 눈가를 쓸어본다.
-드디어 찾았구나. 하랑.
붉게 달아오른 눈 어귀에 다시 한 번 사내의 음성이 아른거렸다. 하랑은 지그시 두 눈을 감았다. 사내의 음성은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