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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건1 (웨슬리, 카인, 레나, 아이작, 윌라드)사이퍼즈 2014. 3. 18. 23:14
[사이퍼즈]
출연 : 웨슬리 슬로언, 카인 스타이거, 레나(이사벨), 아이작, 윌라드 크루그먼
조건 : 웨슬리가 퇴역하기 전, 참전한 대규모 전쟁에서 많은 부하들을 잃는다. 그 당시 살아남은 자는 웨슬리뿐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 휘하의 적군에는 카인이 포함되어 있었으며 그 또한 같은 상황이다. 카인은 저 또한 죽은 것으로 치부되어 퇴역되었고, 웨슬리는 자신의 부하들을 제 실수로 모두 죽였다는 생각에 책임을 지고 퇴역을 결심한다. 그러나 그 직전에, 카인 또한 살아있단 소식을 뒤늦게 알게 되는데. 웨슬리는 카인에 대하여 조사를 하게 되고, 그에게 ‘여자’가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나 그 여자를 국군에서는 ‘이용’한다. 웨슬리는 알아챘다. 자신의 전쟁이 이상하리만치 커다란 참패를 겪게 된 것도, 카인이 이렇게 감쪽같이 ‘죽은 자’로서 몸을 숨길 수 있었던 것도, 그리고 그에 따른 비극도……. 모든 것이 정계와 결탁한 국군의 행각(안타리우스와 숨은 세력)이라는 것을 알게 된 웨슬리는 그에 대응하기 위해 비능력자임에도 불구하고 능력자들의 전쟁에 뛰어들게 된다. 자신과 같은 처지에 처한 카인에게 또 다른 정보를 얻어내기 위하여, 혹은 혹여라도 살아남아 어딘가에 존재할지 모르는 자신의 부하들을 찾아내기 위하여, 그리하여 자신이 지키고픈 무언가를 지켜내기 위해서.
안타리우스는 필요했던 것이다. 자신들의 연구가 빛을 보기 위해, 수십 수만 구의 ‘실험체’가. 그리고 그것은 모두 ‘의문의 후원자’에게서 공급되었다. 웨슬리는 차갑게 식어버린 이마를 쓸었다. 두터운 장갑 사이로 축축한 식은땀이 묻어나는 듯했다.
그 중심에서 다른 이들과 같이 피해를 본 카인 스타이거. 그라면 무언가 알고 있지 않을까. 순간 스치는 생각들을 차분히 주워 담고서 웨슬리가 몸을 일으켰다. 스타이거, 그를 만나야겠다.
‘비능력자면서 괜찮겠냐’는 말을 수도 없이 들었다. ‘그따위 권총 하나로 능력자들에겐 상대도 안 될 텐데.’라는 말도. ‘뭐, 머리쯤은 써줄만 하네.’라는 말도……. 그러나 이 말을 듣는 것은 또 처음이다.
“슬로언. 쓸 만한 그 머리마저 던져버렸나. 잊었어? 여긴 전장이야! 일반인도 아닌 능력자들과 대치중인 상황이라고!”
카인 스타이거. 그렇게나 만나고자 했던 그를 만났고, 그를 따라 능력자들간의 전투에도 따라나섰다. 그런데, 그러한 곳에서 이 녀석을 만날 줄은 정말 상상도 못했다. 이를 갈듯 사납게 읊조리는 카인의 말에 뒤늦게야 정신을 차린 웨슬리가 상대 진영에서 눈을 떼고 서둘러 사과했다.
“미안하네.”
그 입술이 평소와는 다른 빛으로 물든다. 이제는 다물린, 그의 입새에서 흘러나왔던 그 음성은 옅은 혼란이 섞여 있었다.
안타리우스. 그들이 기어코 자신의 예측에 들어맞는 짓을 저질렀던 모양이다. 웨슬리는 꽤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익숙함이 남아있는 그 얼굴로 다시 한 번 시선을 던졌다.
“뭐야, 또 다른 쓰레긴가.”
낯서리만치 신랄한 그 음성에서조차 익숙한 음색이 묻어난다. 굳어있던 웨슬리의 어깨가 일순 흐트러졌다. 투박한 가면 속, 마주친 까만 눈동자가 소름끼칠 정도로 무심한 빛을 띠었다. 저도 모르게 벌어진 입술이, 허공을 저은 팔이, 아무것도 지키지 못한 채 놓쳐버렸던 두 손이 파르르 떨리며 땅으로 치닫는다. 찰나 벌어졌던 그 입술이 무엇을 내뱉었는지 들은 걸까. 멀리서 그런 그를 지켜보던 가면 속 눈동자가 갑자기 형형해져서는 살기 띤 채 달려들었다.
“이 쓰레기가…!”
“슬로언!”
카인이 깜짝 놀라 총을 꺼내들며 다급하게 웨슬리를 불렀다. 그제야 움찔하고 웨슬리의 손이 다시 총구를 겨누지만 하릴없는 허공이다. 카인은 가망이 없다는 것을 깨닫곤 서둘러 웨슬리의 옷깃을 끌어당겨 아군 타워 뒤쪽으로 굴렀다. 덕분에 허공을 스치는 가면의 손이 소름끼치는 굉음을 내며 맨 땅에 쳐박힌다. 엄청난 스피드며, 파괴력을 지녔다 알려진 가면의 ‘아이작’. 안타리우스의, 쉽게 말하자면 행동 대장쯤 될까. 카인이 순식간에 수축한 제 폐를 가다듬으며 신경질적으로 웨슬리의 옷깃을 놓았다. 바로 코앞까지 당도한 흉흉한 가면의 사내에게서 경계를 늦추지 않은 채로 말이다.
“슬로언.”
“미안하네, 카인 스타이거.”
단호한 자신의 음성 탓일까. 아니면 조금 전 그 간담 서늘한 사내의 공격 탓일까. 제정신을 되찾은 듯한 웨슬리의 대답이 들려온다. 여유 섞인 음성, 동시에 철컥하고 들려온 능숙한 장전소리. 카인은 그제야 한시름 놓았다.
“이렇게 만나길 바랐던 것은 아니지만…….”
평소라면 헛소리를 잔뜩 하거나, 저에 대한 충고랍시고 잘난 척 섞인 귀찮은 말들을 구구절절 늘어놓았을 웨슬리인데. 평소와는 다른 그 읊조림에 카인이 잠시 그에게 시선을 주었다.
“자네는 아니로군.”
뭐가 아니라는 걸까. 카인이 의문을 채 삼키기도 전에 웨슬리의 어깨가 움직였다. 탕, 듣기 싫은 총 소리가 묵직하게 귓가를 파고든다. 카인은 그제야 제자리로 시선을 돌리며 재빨리 ‘적’을 향해 총을 겨누었다. 무슨 연유에선지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 자리에 머물러 있던 사내가 다시 돌변하여 “이 쓰레기 같은 총알 따위…!”하고 까득 이를 갈며 달려든다. 그를 향해 웨슬리는 다시 한 번 방아쇠를 당겼다.
“미안하지만 자네는 중요한 것을 잊고 있네.”
웨슬리는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카인은 그를 도와 덩달아 총구를 겨누었다. 이 근처에 있는 적이 저 사내 하나라서 다행이었다. 근처에 박아둔 센트럴이 아직 적군을 읽어내지 못한 것을 보면 당분간 지원군이 도착할 수도 없을 테고. 웨슬리와 함께 상대중이니 비교적 안정적이지만.
“이곳은 ‘우리’ 진영이라는 것과…….”
그래도 혹시 모르니 서둘러 처치하자, 카인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 사이 웨슬리의 총알은 벌써 7발 째 허공만 스쳤다. 애초에 의도한 것이 아니라면 그럴 리가 없을 테지만, 제대로 명중 한 발 하지 못한 그 치고는 표정하며 계속 이어지는 말투가 제법 여유롭다. 카인은 잠시 그가 무슨 생각인지 알 수가 없어 머뭇거리다, 이내 깨닫고는 저격 부위를 수정했다.
“내가 웨슬리 슬로언이라는 것 말일세, ‘아이작’.”
탕, 마지막 웨슬리의 총구가 드디어 아이작의 오른쪽 어깨에 틀어박혔다. 동시에 카인의 총알 역시 가슴을 강타한다. 심장이 있는 왼쪽도 아닌, 오른쪽. 가면 뒤로 숨겨진 아이작의 표정이 굳어졌다. 마주한 그의 눈동자가 딱딱하게 굳고, 이내 분노의 빛을 띠는 것을 보며 웨슬리는 새로이 총알을 장전했다. 아이작의 몸이 총격에 의해 비스듬하게 바닥으로 쓰러진다. 이 쓰레기가. 까드득 악물린 아이작의 입술이 습관과도 같은 그 말을 채 끝맺기도 전에 그의 몸뚱어리가 커다란 굉음과 함께 화염에 휩싸인다.
끝이었다.
웨슬리의 시야에 터져버린 지뢰 부품 일부와 붉은 핏자국이 이리저리 흐드러진 바닥이 보인다. 검게 그을린 주변 어느 곳에도 사내의 사체는 없었다. 혹시 몰라 허공을 겨누고 있던 카인의 총이 거두어졌다. 인식하지 못한 사이 굳어 있던 웨슬리의 어깨에서 스르륵 힘이 풀린다. 비록 죽이진 못했을지언정, 회복하기까지 시간은 좀 걸릴 것이다. 카인은 거둔 총을 챙겨들고 주변에 박아둔 센트럴을 살폈다. 등지며 보았던 웨슬리의 모습을 애써 보지 못한 척하며.
웨슬리의 손에서 미처 장전되지 못한 탄알이 투둑 바닥으로 곤두박질 쳤다.
전쟁은 길어졌다. 이번 전쟁이 유난이기도 했다. 길게 끌고 싶지 않은 전쟁이건만 바라는 대로 될 리가 없지. 자신의 생각이 우스워 웨슬리가 설핏 웃음을 흘렸다. 그나저나 제 4구역에 놓아두었던 센트럴을 잠시 점검하러 다녀오겠다던 친구가 시간이 걸려도 너무 걸린다. 웨슬리는 잠시 시간을 확인해보다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커져버린 불안감을 참지 못하고 걸음을 뗐다.
자신이 맡았던 제 5구역의 정찰은 이미 끝난 지 십여 분이나 지난 시각이었다.
그랬군. 웨슬리가 멀리서부터 보이기 시작하는 익숙한 인영에 혀를 내둘렀다. 주저앉은 카인 스타이거, 그리고 그가 붙잡은 레나. 아니, 이사벨이라고 했던가. 이미 만신창이가 된 카인의 손이 여성의 발목을 붙잡는다. 그녀는 그것을 뿌리치고 한 번 더 발을 날렸다. 투박한 타격음과 함께 배를 부여잡은 카인의 입새로 피가 왈칵 흘러나온다.
“레나…….”
그것을 지켜보던 웨슬리의 손이 천천히 하늘을 향한다. 탕, 커다란 공포탄이 허공에 쏘아지고 웨슬리의 신형이 땅을 박찼다.
“이쪽이다!”
그 커다란 음성과 소리에 놀라 레나를 붙잡고 있던 카인의 시선도, 다시 발길질을 준비하던 레나의 시선도 웨슬리를 향했다. 이내 소름끼치는 소리가 머리 위를 스친다. 그에 영문을 모른 채 곧장 소리가 들려오는 곳으로 시선을 든 레나와는 달리 카인은 헛숨을 들이켜고, 레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레나!”
위험하다. 그것을 카인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필사적으로 레나를 지키려던 카인의 손길이 익숙한 누군가에 의해 막혔다. 그것도 모자라 그는 카인을 끌고서 건물 사이에 있는 틈으로 집어던지고는 억지로 엎드리게 한다. 카인은 이곳저곳 비명을 지르는 몸뚱어리를 무시한 채 있는 힘껏 몸부림을 쳤다.
“슬로언, 비켜! 제발…!”
난 레나를 구해야한단 말일세. 카인의 절규가 내뱉어지기 무섭게 고막이 찢어질 듯한 커다란 폭음과 뜨거운 기운이 몰아친다. 싸하게 온 몸이 식었다. 카인의 몸에 잔뜩 들어갔던 힘이 순식간에 빠지고, 그에 그를 압박하던 힘도 덩달아 풀린다. 그제야 움직일 수 있게 된 몸을 카인이 천천히 일으켰다.
레나.
턱 막힌 말문 탓에 카인의 입이 뻐끔 헛된 공기를 머금는다. 부들부들 떨리는 다리로, 파르르 떨리는 입술로 레나가 있던 곳을 향해 다가가, 레나를 찾는다. 뿌옇게 뜨겁고 탁한 공기와 함께 시야를 가린 허공으로 무의미하게 손을 저었다.
“레나.”
다시 한 번 불러본 그 이름에, 기적처럼 허공이 반응했다. 카인이 일순 그 자리에 멈춘 순간 흙안개가 걷히고 엄청난 속도의 공격이 그에게 쏟아졌다.
“‘적’군이 둘로 늘었습니다. ‘아이작’.”
제 공격을 맞고 쓰러진 카인을 내려다보며 레나가 작게 중얼거렸다.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온 이름 탓에 웨슬리가 잠시 멈칫했다. 통신이라도 하는 건가. 굳은 표정으로 몸을 일으키던 웨슬리는 채 다 몸을 펴기도 전에 다시 주춤 행동을 멈추었다. 카인을 챙기다 경미한 화상이라도 입었는지 등짝이 다 따끔하다. 신음을 삼키 채 웨슬리는 슬쩍 상황을 재보았다. 자신의 미약한 상처 따위는 정말 문제도 아니다. 문제는 카인 스타이거, 저 친구지. 저 친구, 저거 저대로 두었다간 내장이 다 문드러질 게다. 가볍게 한숨을 내쉰 웨슬리가 이내 천천히 총구를 들었다. 최대한 자신 쪽으로 눈을 돌려 시간을 번다. 그 사이 저 친구가 정신을 차려주면 좋을 텐데. 웨슬리는 좁은 건물 사이를 빠져나와 몰래 지뢰를 설치하고, 마침내 방아쇠를 당겼다.
“레나…!”
레나에게 정신이 집중되어 그것을 모르고 있던 카인이 레나의 바로 코앞을 스치는 총탄에 놀라 레나를 불렀다. 지금 그녀는 그가 생각하는 옛날의 연약했던 그 여성이 아닐진대. 웨슬리가 작게 혀를 찼다. 정신 차리라니까, 이 친구야. 빗나간 총탄을 인지하고 레나의 시선이 웨슬리에게 고정된다. 자신이 뭐라 할 처지는 아니지만……. 웨슬리는 곧 다가올 레나의 공격을 대비해 온 몸에 힘을 주었다. 그 와중에 빠른 속도로 저에게 달려오는 레나의 발이 정확하게 지뢰를 즈려밟은 것을 확인하면서 말이다. 카인 그가 제발 지금까지 얻어터진 걸로 만족하고 정신 차렸으면 싶다. 지뢰의 폭음과 함께 엄청난 고통이 몸 이곳저곳에 몰려드는 것을 느끼며 웨슬리가 스르륵 눈을 감았다. 힘껏 눈꺼풀을 붙잡고 있던 신체의지에 반한, 불가항력이었다.
“‘적’군 웨슬리 슬로언 잡았습니다. 사망 확인, 포획할까요? 아이작.”
레나가 또다시 읊었다. 감정 없이 차가운 그녀의 음성이 카인의 귀에 흘러든다. 멍한 그의 얼굴이 처음으로 레나가 아닌 허공을 향했다. 슬로언. 조금 전까지 멀쩡했던 자신의 동료가, 그에게 무슨 일이, 대체……. 허망하게 열렸던 그의 입매가 다물리고, 그녀를 향해 뻗었던 갈 길을 잃은 그의 손이 땅에 떨어졌다.
-아니, 그딴 쓰레긴 그냥 냅둬. 늙은 몸뚱이 따위 필요 없어.
귓가에 들려오는 아이작의 음성을 들으며 그녀, 레나는 자신의 공격을 맞고 시체처럼 널브러진 웨슬리를 확인하곤 몸을 돌렸다. 이대로 두면 곧 끊어질 숨이고, 그녀에겐 또 하나의 적이 남아있었으므로.
“레나…….”
그가 부르는 자신의 이름이 왜 이리 구슬프게 들리는지 알 수 없었다.
“자넨, 날 알고 있나?”
그리고 그를 향해 자신이 공격을 날릴 때마다 왜 자꾸만 마음속에 망설임이 생기는지도.
“카인 스타이거, 42세. 코드명 ‘구원자(SALVATOR)’. 신장은 180cm이며, 체중은 72kg. 전직 군인이었고…….”
전부. 알 수 없는 감정뿐이었다. 레나는 그의 질문에 자동적으로 입력된 데이터를 읊다 멈추었다. 그의 입새로 터져 나온 웃음 탓이었다. 그녀의 고개가 갸울어진다.
“틀린 부분이 있습니까?”
“아니…….”
틀린 부분? 없다. 오히려 너무나……. 너털하게 웃음을 흘리며 카인이 그녀의 물음에 답했다.
“정확하다.”
이것으로 정해졌다. 카인의 대꾸에 레나가 갸울였던 고개를 바로하고 푹 수그러진 그의 모습을 잠시간 바라보았다. 아까부터 그는 자신의 이름만 불러댔었고, 제게 단 한 번의 공격도 날린 적이 없다. 그렇다면. 판단을 마친 레나가 이내 몸을 돌렸다.
“전투 의지 제로. 싸울 의욕이 없는 사람은 ‘적’이 아닙니다. 물러나겠습니다.”
가벼운 발걸음 소리가 주저앉은 카인의 귓가를 맴돈다. 서서히 멀어지는 그녀, 그리고 자동적으로 계산되는 그녀 ‘레나’와의 거리.
-분노로 가득한 자는 냉정함을 잃고 보고 싶은 것만 보는데, 오히려 그는 더 침착해.-
지금껏 가만히 멈추어 있던 카인의 손이 서서히 움직였다. 앞으로 세 걸음.
-그렇지만, 나는 그래서 그가 더 걱정이네.-
뻗은 손끝에 익숙한 총의 손잡이가 닿는다. 앞으로 둘. 총을 지지한 어깨가 여느 때와 같이 흔들림이 없었다.
-그 타고난 냉정함이…….-
이제 하나. 철컥, 장전을 마치고 방아쇠를 쥔 손가락이 차갑게 식었다. 스코프 사이로 걸음을 멈추고 자신을 바라보는 레나의 얼굴이 보였다.
-되레 그를 무너뜨릴까봐.-
탕, 그 손가락이 움직임과 동시에 드라그노프 특유의 총성이 울렸다.
삐, 삐, 삐… 일정한 소리가 흐릿한 의식 속에 들려오고, 낯선 향기가 코 어귀를 맴돈다. 아니, 낯설지만은 않은가. 대부분의 사람들이 익히 알아챌 수 있는 병원의 냄새였으니. 웨슬리는 축 쳐진 몸을 일으키려다 포기했다. 손가락 하나도 천근처럼 까딱할 수 없었던 탓이었다. 답답함에 푹 한숨을 쉬려 했으나 입가에 달린 호흡기 탓에 그것도 무산되었다. 잠시 가만히 있던 웨슬리가 살짝 눈꺼풀을 들었다 놓았다.
이거, 눈 하나 제대로 뜨기도 힘들군.
평상시의 자신이라면 너털한 웃음을 터트렸으리라. 픽하니 힘없이 웃어놓고 다시 의식을 놓는 웨슬리의 귓가에 드디어 ‘소식’이 전해졌다. 드르륵, 병실 문을 여는 소리. 또각또각 구두발굽소리, 그리고…….
“그 전투에서 살아남은 것은 이 자뿐입니까? 카인 스타이거도 함께였을 텐데요.”
사무적인 어투의 사내가 말한다. 그 곁에 또 한사람이 멈춰 섰다. 웨슬리는 흐려지는 의식 속에서 무심코 그 음성에 귀를 기울였다.
“예, 그게… 머리에 총알이 박혀 즉사했기 때문에 조치를 취할 수 없었습니다.”
“그것 참 안타깝군요…….”
즉사. 머리에, 총알이 박혀. 여지껏 가만히 있던 웨슬리의 손가락이 움찔하고 움직였다. 멈춰 서 있던 인기척이 잠시 뒤 다시 움직였다.
“좋은 인재를 잃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