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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룡이 냐르샤] 새벽녘기타 2016. 1. 23. 01:12
[육룡이 냐르샤] 새벽녘
짹짹 우는 새 소리에 선미가 눈을 뜬다. 아침 댓바람부터 한숨을 쉬는 것은 그리 좋은 행동은 아니지만, 어쩔 수 없다. 오늘도 밤을 새어버리고 말았다. 푸욱 한숨을 내쉬며 지끈거리는 머리 위로 팔을 얹는다. 팔뚝의 무게가 이마를 누르며 그나마의 두통을 줄여준다. 무거운 눈꺼풀을 감으니 까만 밤이 펼쳐지고, 그 속에 언제나와 같은 그림이 그려진다.
하얀 눈이 내리고, 비틀거리는 네가 있고, 붉은 핏물이 흐르고, 서슬 퍼런 칼날이 허공을 가른다.
선미가 팔뚝에 힘주어 눈두덩을 짓눌렀다. 다시 한숨을 쉬며 턱 막혔던 속을 풀어본다. 별반 달라진 것은 없지만 그래도 가만히 있는 것보다야 나았다.
잠을 자긴 글렀군.
눈 붙이는 것을 포기하고 선미가 몸을 일으켰다. 낮게 피곤할 것이 선하지만 하는 수 없다. 지금 상태로는 아무리 눈 감고 누워 있는다 해도 잠을 이루진 못할 것이다. 옷가지를 챙겨 입은 그는 방을 나서기 위해 문을 열었다. 삐그덕, 채 다 열기도 전에 그 손이 멈춘다.
살짝 열린 문틈 새로 시린 바람이 들어오고, 새하얀 눈밭의 풍경이 펼쳐진다.
근래 들어 제법 날이 차다 싶더니만 간밤에 눈이 내렸는가. 마저 방문을 열고 나오며 선미는 끝없이 펼쳐진 하얀 세상에 시선을 두었다. 잠을 자지 못하여 시린 눈가에 찬바람이 닿아, 무심결에 깜빡 눈을 감았다 뜬다.
아우가 떠난 것이 딱 이맘때쯤이었을 것이다. 선미는 눈 쌓인 산등성에서 눈을 떼고 발치를 내려다보았다. 신을 신고 나가야할 그곳엔 수북하게 눈이 뒤덮여 있다. 사박, 발을 내딛으며 선미는 속으로 떠오르는 얼굴을 되짚어보았다.
그래. 딱 이맘때의 새벽에는 늘 네 생각이 났다.
이제는 그 얼굴마저 흐릿한, 아우님 생각이 말이다. 저와 같은 얼굴인데도 이상하게 그 느낌이 생각나지 않는다. 우습다. 아우가 죽은 지 이제 고작 몇 해가 지났을 뿐인데……. 한쪽 발로 눈길을 밟은 그대로 우뚝 서 있던 선미가 나머지 한 발을 내딛었다.
사박사박 어디서 나는 것인지 모를 소리가 선미의 귓가를 간질인다.
아우야.
조용히 그 이름을 불러보았다. 속으로 부른 것인지라 답은 들려오지 않을 것이지만, 어쩐지 귓가에 그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저 멀리 뛰놀며 눈덩이를 던질 것 같은 아우의 환영이 스쳤다. 설핏 선미의 잇새로 웃음이 흘렀다.
이제 너를 떠올려도 더는 찢어질듯 아프지 않는구나.
웃는 얼굴로 읊조려본다. 여전히 그것은 그 누구도 듣지 못할 말이었다. 선미는 차가운 공기를 한 움큼 들이켰다 내쉬었다. 전에는 그리도 아팠던 마음이었건만. 그래, 어쩌면 잘 되었다. 이렇게 이 슬픔에도 끝이 찾아온 것이겠지. 하여 아픔이 가라앉고, 이 마음의 침묵이 계속된다하면 그땐.
저 멀리 보이던 태미의 형상이 훅하니 사라진다. 깜빡 피곤한 눈을 감았다 떴다. 시야에 들어온 것은 공허한 세상뿐. 선미는 잠시 멈추었던 걸음을 다시 옮겼다.
“그때에는.”
그땐 말이다, 아우야. 가슴에 묻어두었던 제 아우에게 다짐하듯, 선미는 저 홀로 속삭인다. 안녕을 고할 것이다. 다시는 만날 수 없는 너와의 영원한 안녕을.
새하얀 입김이 선미의 입새를 빠져나온다. 허공에 그려진 하얀 구름이 언뜻 아우의 미소를 닮은 것 같아 보여 선미는 실없는 미소를 지었다. 만날 수 없으니 더 보고 싶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