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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룡이 나르샤] 이인겸기타 2016. 1. 9. 23:01
[육룡이 나르샤] 이 인겸
젊을 적에는 영원할 것만 같던 삶이 이제는 끝이 보이는구나. 인겸은 살짝 눈을 감기만 해도 떠오르는 옛 기억에서 매번 헤어 나오기 위해 애를 써야했고, 몸을 가눌 힘이 없어 하루 대부분을 누워 지냈다. 숨 쉬기 버거운 날도 있었고, 어느 날엔가는 꼬박 하루를 기절하듯 잠들어 있던 적도 있었다.
나도 이젠 나이를 먹은 게지.
혼잣말로 허공에 대고 말을 걸어본다. 인겸은 웃음이 흘러나왔다. 누구에게 말하는 것인가, 이제 제 곁에 남은 것은 없건만. 사내로서 이룰 것은 모두 이루었다. 깜빡 무거워진 눈꺼풀을 감았다가 인겸은 스치는 얼굴에 다시 눈을 떴다.
어르신, 이렇게 누워만 계시면 어떡해요.
어언 수십 년이다. 수십 년의 세월을 지켜봐온 아이가 있다. 아마 저가 가장 오랫동안 시선을 주었고, 마음 또한 내어준 아이가 아닐는지. 그러니 이리 환청까지 들리는 것이 아니겠느냐. 인겸은 그리 생각하면서도 귓가를 아른거리는 정겨운 소리에 눈을 깜빡 치떴다.
어르신은 다 좋은데 체력이 부족하셔. 자, 따라해 보셔요.
그 옛날, 불혹이 조금 넘었을 즈음이었나. 실은 항시 곁에 있던 것이 그 아이였던지라 그날이 언제고, 언제가 그날인지조차 기억 속에 얼기설기 엉켜있다.
에이, 어르신도 차암. 따라해 보시라니까요? 피로가 싹 가실 거예요, 어르신!
그 당돌한 말투를 들었던 것이 어디 하루 이틀이었겠느냐. 인겸은 설핏 웃었다.
그래. 어느샌가였다. 어느샌가 그 아이는 제게 그런 말을 하지 않게 되었다. 약관이 넘어갈 즈음이었던가. 아마 인겸 스스로는 되지 않을 거란 걸 깨달은 거겠지. 포기한 것이겠거니 했었건만. 실은 그것이 아니었다. 아이의 눈동자가 떠오른다. 어느 순간 걱정하던 타박하던 당돌하던 눈매가. 어찌 변하였던가.
합하. 제가, 이 길태미가 합하를 지켜드리겠어요.
인겸이 잠시 눈을 감았다. 눈꺼풀을 뜨고 있기가 힘겨워졌던 탓이다. 눈앞엔 여전히 같은 그림자가 있었다.
태미야. 그렇게 부르면 항시 들려오던 낭랑한 음성은 이제 들리지 않는다. 인겸은 감은 눈을 더는 뜨지 못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