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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룡이 나르샤] 꿈기타 2016. 4. 23. 00:05
[육룡이 나르샤] 꿈
태미에게는 형제가 있었다. 한날한시에 태어난 쌍둥이의, 성은 같은 길吉씨요 이름은 선미善味라는 아주 꼭 닮은 남자형제가.
‘있었다’는 것은 지금은 없단 이야기다. 어릴 적 어떠한 연유로 죽어 세상을 떠났다고 아버지와 어머닌 말씀하시곤 했다.
그에 대한 이야기는 어릴 적부터 하여 다 클 때까지 네댓 번은 더 들었다만, 사실 태미는 기억에도 없는 형제에 대하여 별 관심이 없었다. 어떤 꿈을 꾸기 전까지는 말이다.
어떤 꿈.
그게 무엇이냐면 바로 저가 ‘길 선미’가 되는 꿈이었다.
꿈속에서 선미가 된 그는 어떤 연유에선지 악귀가 되어 허공을 떠돌고 있었다. 정확히는 어떤 집 앞을 서성이고 있기에 고개를 갸웃하곤 그 초가집 안에 쑥 고개를 집어넣었다.
두리번 방 안을 살펴보니 자그마한 인영 둘이 나란히 누워 자고 있다. 어두워서 잘 보이진 않았지만 그는 바로 알아챘다.
길 태미, 그리고 길 선미의 어린 시절.
그러나 곧 그는 의아해졌다. 자신은 현대의 인물이고 제게는 현재 쌍둥이가 없다. 심지어 너무 어릴 적에 죽어 기억조차 나지 않는단 말이다. 그런데 어떻게 이 두 아이가 자신과 제 쌍둥이의 어린 시절이란 것을 퍼뜩 깨달을 수 있었을까?
의문이 새록새록 자라날 즈음, 뒤척이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는 사색을 멈추고 끙끙대는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저와 같은 얼굴의 아이, 길 태미吉 太味였다. 혹시나 하여 나란히 누운 쌍생의 얼굴 또한 확인해 보았으나 똑 닮은 얼굴을 두고도 그의 촉은 틀림없다는 듯 ‘뒤척이는 저 아이가 바로 길 태미일 것’이라 바로 가리켰다.
기이하게도 그는 그 감을 믿었다. 한 걸음 아이에게 다가서자 저가 정말 악귀가 된 사실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시커먼 연기가 두 눈에 여실히 뵌다. 선미는 미간을 찡그렸다. 그 기운이 제법 범상치 않아서였다. 게다가 끙끙 앓는 아이의 모습이 안쓰럽기도 했고……. 대체 무슨 악몽을 꾸기에 저리도 안색이 창백할까 마음에 걸려 선미는 고민하다 손을 뻗었다.
어린 태미의 이마에 반투명한 선미의 손끝이 닿았다. 그는 차가운 기운이 휘몰아치며 자신의 손을 밀어내는 것을 느꼈다. 찰나였지만 그 순간 아이의 꿈이 보였다.
선미가 와락 인상을 쓴다. 그것은 아이가 꿀 만한 꿈이 아니었다. ‘안 되겠다’고 선미가 생각한 순간, 아이의 기운이 요동쳤다. 너무 오래 손을 대고 있었던가 그나마 버티고 있던 아이의 푸른 기운이 저를 억압하는 까만 기운이 늘어나자 어떻게든 무리를 해서라도 몰아내려 안간 힘을 쓰려는 듯 크게 일렁였다.
아차, 선미는 저 또한 악귀가 되어버린 처지를 깨닫고는 황급히 손을 떼었다. 뒤늦게야 저 또한 아이에게 해가 될 수 있음을 떠올린 것이다. 착잡한 표정으로 어린 태미를 내려다보던 선미는 문득 ‘저 검은 기운을 몰아낼 순 없을까’ 고민했다.
저 기운이 제게 보인다는 것은 저것에 어떠한 영향을 줄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보던 선미가 지체 없이 손을 뻗었다. 또다시 수상쩍은 기운이 다가오자 아이의 기운이 일렁인다. 그럴수록 아이의 안색은 더욱 더 창백해져만 갔다.
선미는 안타까운 마음에 입을 떼어 속삭였다.
[너를 해치려는 것이 아니다. 네 꿈을 거두어가려는 것이야.]
그것이 들릴 리 없음을 알고 있지만서도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런 것뿐인지라 뻘뻘 식은땀이 흐르는 아이의 머리칼을 넘겨주며 선미는 아이를 감싼 기운의 동태를 살핀다. 잠결에 귀신인 선미의 말을 듣기라도 한 것 마냥 일순 아이의 기운이 가라앉는다. 그때를 틈타 선미는 까만 기운을 건드렸다. 헤집어놓거나 갈라지지 않는다면 마지막 수단으로 저가 흡수할 셈이었다.
휘휘 손을 저어도 보고 들고 있던 검집으로 베어도 보지만 역시나 지레짐작했던 것처럼 뜬구름 잡듯 하다. 결국 선미는 그 기운을 흡수하기로 마음먹었다.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더욱 갑작스럽게, 훅하니 딸려오는 그 기운에 그는 놀라며 눈을 홉떴다.
그 이상한 꿈 때문에 태미는 요 며칠 내내 기분이 싱숭생숭했다. 실제로도 그렇고 꿈에서도 그렇고, 그 전까진 귀신의 귀자도 본 적 없었는데 갑자기 저가 죽은 쌍둥이 귀신이 되는 꿈이나 꾸고 앉아있으니 기분이 묘했다.
그래서 그런가. 자꾸만 그 꿈이 기억에 남고 이상하게 신경 쓰였다. 그 탓인지 피로도 축척되고 있고……. 전철 한 켠에 서서 창밖을 바라보며 홀로 생각에 빠져있던 태미는 굳은 몸을 풀며 한숨을 쉬었다. 한쪽으로 기댄 채 계속 서 있었더니 목 뒤가 뻐근하다.
그래도 이번 정거장에서 내리기만 하면 집까지는 5분도 안 걸린다. 곧 편히 쉴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태미가 뒷목을 붙잡고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다 잠깐 눈을 지그시 감는다.
그 순간, 싸한 느낌이 목 언저리를 스쳤다. 번뜩 눈을 뜬 태미의 시야에 보인 것은 천천히 멈춰서는 전철 밖, 이질적이리만치 새까만 공간.
온몸에 소름이 끼쳐 그대로 굳었다. 설마 제 주변까지 저렇게 새까만 것은 아니겠지? 만에 하나 그렇다면 저 어둠에 먹혀버리는 것은 시간문제일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제 주변을 확인하기 위해 주위를 돌아보고 싶었으나 그랬다간 이보다 더한 공포가 돌아올 것 같아서, 태미는 차마 굳은 그대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점점 더 잠식해오는 공포에 태미의 숨이 차오르고 그 안색이 새파랗게 질려갈 때쯤.
서겅, 무언가 베는 소리가 들렸다.
온몸을 짓누르던 싸한 기운이 순식간에 사라진다. 태미가 고개를 들었다. 사그라지는 어둠 속 익숙한 얼굴이 그를 마주보았다.
“너 누구야.”
반사적으로 그렇게 물으며 태미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마주한 까만 눈동자가 낯설지 않다. 익숙한 눈매, 요상하지만서도 낯설지 않은 옷차림, 그리고 현대엔 존재하지도 않을 것 같은 검. 그는 태미와 똑 닮은 얼굴로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웃었다.
“시대가 변해도 버릇없는 것은 매한가지구나.”
길 선미吉 善味. 태미가 알 수 없는 얼굴을 하고서 그를 바라본다. 선미의 표정은 제법 여유로워보였다. 그에 울컥하여 태미가 뻐끔 입을 열었다가 별 말을 내뱉지도 못하고 금세 다물었다. 할 말이 많지만 하지 않겠다는 얼굴로 고개를 돌린다. 그것을 모두 지켜본 선미는, 저 얼굴을 이런 식으로 또 보게 될 줄은 몰랐어서 픽하니 웃고 만다.
다시 만난다면 그 손에 쥐인 게 칼이 아니라 꽃이었으면 했건만, 이번에도 온전히 꽃을 쥐고 있진 않은 모양이라 선미는 살짝 아쉬워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