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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룡이 나르샤] 길 태미 (吉 太味)기타 2015. 12. 2. 23:53
[육룡이 나르샤] 길 태미 (吉 太味)
최종수정일 [2016.01.17 20:04]
앳된 소년이 하나 둘 구령을 뱉는다. 가쁜 숨이 소년의 음성과 함께 흘러나왔다. 소년은 양손이 다 트도록 강하게 쥔 목검을 같은 자세로 몇 번이고 휘둘렀다. 얼마나 흘렀을까? 소년의 눈이 비 오듯 쏟아지는 땀에 감긴다. 멈춰선 소년의 시야에 문득 예쁜 꽃 하나가 들어왔다.
어?
동글동글한 모양새로 노랗게 제 색을 발하고 있는 귀여운 꽃. 소년, 태미의 시선이 그곳에서 떨어지지 못한 채 한참을 머물렀다.
예쁘다.
가만히 그 꽃을 바라보던 소년이 조심조심 걸음을 떼어 꽃 앞에 멈추어 선다. 하지만 거기서 그치지 못하고 결국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가까이서 본 노란 꽃은 멀리서 보았을 때보다 훨씬 더 예뻤다. 태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감돌았다. 그러나 곧 움찔 얼굴을 굳혀야 했다.
‘태미 네 이놈! 사내가 되어서 계집년마냥 그딴 거나 가지고 놀 테냐?’
금방이라도 아버지의 성난 음성이 저를 덮쳐올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소년 태미는 괜스레 저 홀로 찔려서 휙하니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버지는 하루 내내 홍사범이란 자에게 자신들을 맡겨놓고 얼굴도 내비치지 않기 때문에 이곳에 있을 리가 없다. 하지만, 불안했다. 태미는 이리저리 주위를 모두 둘러보고 나서야 아버지가 없다는 것에 안심하고 다시 꽃을 향해 시선을 주었다.
아무리 보고 또 보아도 어여쁜 꽃이다. 그 입가에 다시 미소가 찾아왔다.
잠시, 아주 잠시만이라면 괜찮지 않을까? 재차 주위의 눈치를 살피고서 태미는 들고 있던 목검을 잠시 꽃 옆에 내려놓았다. 그 손이 머뭇거리며 꽃줄기로 향한다. 혹여 꽃잎이 상하기라도 할까, 살살 꽃가지를 꺾어 두 손에 쥐어본 태미는 보들보들한 꽃잎의 감촉에 헤실 웃었다.
들뜬 표정으로 태미는 이번엔 주변의 다른 무언가를 찾기 시작했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한참이 지나고 나니 어느새 저가 생각했던 것보다 꽤 많은 걸음을 옮기게 되었지만 그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계속해서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태미가 있던 자리엔 덩그러니 그의 목검만이 남았다.
“태미야!”
태미야, 어디 있니? 선미는 이리저리 동생 태미가 있을 곳을 찾아다녔다. 본래라면 뒤뜰에서 같이 검을 휘두르고 있었을 시간이다. 그러나 사부님의 심부름을 다녀오느라 태미를 먼저 보낸 것이 문제였다. 이곳에 가만히 있겠다고 약조했는데, 다녀오니 태미는 온데간데없다. 있어야할 곳에서 태미의 그림자 한 톨 발견하지 못한 것이다. 왜 하필 홀로, 그 심부름을 다녀오겠다 한 것일까. 차라리 같이 가겠다 떼쓰던 아우님과 함께 갔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터인데.
뒤늦게 후회해보지만 이미 벌어진 일이요, 엎어진 물이다. 조급한 마음에 한 시진이 넘도록 주변을 뛰어다니던 선미가 흐르는 땀을 대충 닦아내며 다시 뒤뜰에 도착했을 때, 그는 그제야 저 멀리 바닥에 덩그러니 남겨진 낯익은 목검을 발견했다.
선미의 걸음이 멈추었다. 뒤늦게야 그 주변이 눈에 들어왔다. 목검이 놓인 자리는 평소 수련하던 곳보다 조금 더 깊은 곳이었다. 그러고 보니 겨울이었을 땐 몰랐는데, 봄이 차오르듯 근처 언저리엔 예쁜 꽃이 그새 한 가득 피어있었다. 주변을 수놓듯 군데군데 자라난 꽃들에, 선미가 그제야 안도하듯 숨을 골랐다.
아, 맞다. 태미는 꽃을 좋아했지.
선미는 아우님의 마음을 헤아려보았다. 이제 막 이파리를 돋아낸 꽃들이 어여쁘기 짝이 없다. 제 눈에도 아름다워 보이는 것인데 어여쁜 것을 좋아하는 아우님이 홀리지 아니했을 리 없다.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닐까 지금껏 걱정했는데 그건 헛된 것이었다. 불안스럽던 마음을 접고서 선미는 설핏 미소를 지었다. 가장 어여쁜 꽃을 따라가면 아우님이 있겠구나. 선미의 걸음이 귀여운 노란 꽃을 따라 옮겨졌다. 그 속에 간간이 섞인 이름 없는 하얀 들꽃이 그 발걸음에 따라 흔들렸다.
꽃밭에 고개를 묻듯 쪼그려 앉은 태미는 손 안의 작은 꽃가지에 한창 집중하고 있었다. 노란 꽃반지는 이미 완성했고, 이제 흰 꽃반지를 엮을 차례. 태미의 손이 하얀 꽃가지 두어 개를 붙잡고 이리저리 매듭을 짓는다. 그 모양새가 제법 꼼꼼한 것을 보니 한두 번 해본 것이 아닌 모양이었다. 가운데 한 꽃가지를 두고 두 꽃가지를 모아 서로 풀리지 않게 단단히 엮는다. 완성된 반지를 보며 태미가 환하게 웃었다. 조금이라도 힘을 주면 끊어질 것 같지만 그래도 어여쁜 반지다. 당장이라도 손가락에 끼고 싶어서 두 꽃반지를 들고 이리저리 만지작거렸다.
“야.”
그때 돌연 낯선 음성이 들렸다. 눈앞까지 드리운 새카만 그림자에 태미는 아차했다. 창백한 얼굴로 고개를 들자 거기엔 저보다 두어 마디는 큰 덩치의 시커먼 무리들이 있었다. 그래봤자 성인이 채 못 된 사내애들이었지만 그 수가 만만찮다. 태미는 순간 몰려드는 두려움에 창백한 얼굴로 손을 뻗었다.
“얘가 걔야?”
“어, 이 자식 봐. 계집애처럼 비실비실해가지고. 갖고 노는 것도 딱 계집이라니까.”
저를 향한 삿대질과, 낄낄대는 웃음, 그리고 까만 어둠이 태미를 향해 몰려든다. 태미는 저가 꽃반지를 들고 있었단 것도 잊은 채 비어버린 양 손으로 열심히 주변을 더듬거렸다. 제대로 먹지 못해 빼빼마른 손가락에 애먼 땅만을 헤집는다. 이미 한참 전에 내팽개친 목검이 여지껏 제 곁에 있을 리가 없다. 텅 빈 손이 떨려왔다. 태미는 몸을 움츠리고 질끈 두 눈을 감았다.
“야. 너 계집 아니냐?”
“이렇게 못난 계집이 어디 있냐?”
깔깔 웃으며, 어느새 태미를 둘러싼 아이들이 하나둘씩 그를 건들기 시작한다. 발치부터해서 툭툭 치는 것에 태미는 움찔움찔 몸을 떨었다. 잔뜩 굳어 오들오들 떠는 그 모습에 사내애들은 재미를 느낀 듯 더 나아가 손을 뻗는다.
한 아이는 태미의 머리채를 잡았으며, 한 아이는 돌을 쥐고 던졌다. 또 다른 아이는 옷가지를 쥐어뜯을 듯이 잡고 발로 차대었다.
“너 이제 무공 배운다며?”
“홍대홍인가 뭔가 하는 그 사기꾼한테 백날 배워봐라!”
“이것 봐, 반격도 못하잖아.”
태미는 혼비백산한 정신머리 새로 흘러드는 그 음성에 입술을 깨물었다. 그들 말이 맞았다. 사부는 무언가 모자라보였고, 남에게 자신의 지식을 가르치는 것 말고는 그것이 제 지식이라 해도 스스로 쓰는 것조차 하지 못하는 소위 말만 뻔지르르한 사내였다.
“사기꾼 밑에서 뭘 배우겠냐? 얼레리꼴레리.”
하지만, 하지만 그는 이런 자들관 달랐다. 저를 타박하기만 하던 아버지와도 다르고, 거지 보듯 하는 저작거리의 사람들과도 달랐다. 그러니까 이들은 그를 욕할 자격이 없다. 태미는 울컥하여 저가 맞고 있단 사실도 잊은 채 벌떡 일어섰다. 저를 붙잡고 있던 아이들의 손이 잠시 움찔하였지만 체격차이가 워낙 많이 났기 때문에 그들을 완전히 떨쳐낼 수는 없었다.
“뭐야, 무공 좀 배웠다고 덤비려는 거야? 해봐. 쳐보라고!”
주춤했던 아이들이 더 성이 난 표정으로 태미를 향해 달려든다. 상대적으로 체구가 작은 태미는 결국 그들의 손길 두어 번에 밀려 넘어지고 말았다. 바닥으로 엎어진 태미의 몸 위로 네댓 개의 발길질이 이어지고, 그 작은 몸은 온전히 버티지 못하고 이리저리 거칠게 흔들렸다.
온몸을 내려치는 고통에 태미는 질끈 두 눈을 감고 몸을 웅크렸다. 어떻게든 통증을 최소화하기 위한 몸부림이었으나 무용지물이었다.
“어어. 거기 뭐하는 거야!”
왜 하필, 그때였을까. 조금 더 늦게 나타났다면, 아니면 조금 더 빨리 나타났다면 좋았으련만. 기적처럼 정신없는 틈새로 들려오는 목소리에 태미는 울컥하는 마음이 드는 것도 잠시 알 수 없는 안도감에 있는 힘껏 주었던 힘을 풀고 살며시 눈을 떴다. 제게 쏟아지던 손길과 발길은 멈춘 지 오래였다.
“어? 사기꾼이다!”
“사기꾼이다아!”
대신에 아이들이 비웃음과 놀림이 와르르 쏟아진다. 저에게 향하던 것이 모조리 갑자기 나타난 사내, 홍대홍에게 향한 것이다. 비틀비틀 일어나며 태미는 멀어져가는 아이들의 웃음소릴 들었다. 동시에 제 작은 몸을 감싸 안는 온기를 느꼈다.
“거기 서! 아니다, 에끼 저리 가라! 태미야. 태미야, 괜찮으냐?”
걱정스런 음성으로 사내는 태미의 몸을 일으켜 세우고 이리저리 그 몸을 살폈다. 태미는 입술을 지르문 채 가만히 있었다.
“왜 말이 없어? 괜찮냐니까?”
어휴, 이거 봐. 한쪽 팔은 아주 퉁퉁 부었구만. 저번에 부러진 갈비뼈는 괜찮은 게냐? 폭포처럼 쏟아지는 사내, 홍 사부의 말에 태미가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투둑 눈물이 떨어진다. 홍대홍의 눈이 커다랗게 치뜨였다.
“어, 어디 아픈 거냐? 응? 여기? 여기가 아픈 게야?”
사내는 꾀죄죄한 몰골이 된 태미의 몸을 이리저리 둘러보더니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혀를 차며 그를 끌어안았다.
“가자. 사부랑 집에 가자, 태미야. 가만 놔뒀다간 몸 다 상하겠다. 의원이라도 불러야지, 원.”
이거 무공을 가르치는 건지 애를 돌보는 건지 모르겠네, 중얼거리며 홍대홍은 끌어안은 작은 몸을 조심조심 양손으로 고쳐 안았다. 혹여나 저가 아파하기라도 할까 걱정하는 것 같은 그 행태에 태미는 결국 울음보를 터트렸다.
엉엉 소리까지 내며 우는 태미에 당황한 것은 홍대홍이다. 그는 어쩔 줄을 몰라 하며 어기야둥기야 아이를 달랬다.
“알았다, 알았어, 의원 싫으면 곧장 집에 가자꾸나. 너 좋아하는 선미가 고기반찬 사가지고 온댔으니 가서 밥이나 든든히 먹자. 응? 그러고 빨리 나아야지 않겠냐. 응, 태미야.”
자신이 서러운 것인지, 어쩐 것인 알 길이 없을 정도로 태미는 복받치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몸을 들썩였다. 매번 툴툴대던 아이가 안겨오니 더더욱 어쩔 줄을 모르며 홍대홍이 횡설수설 아이를 달랜다.
“그래. 이만 그치자. 가뜩이나 없는 힘이 더 빠져나가겠구나. 응? 네가 쓰러지면 선미 그 놈이 나를 가만두지 않을 게야. 그러니 그만 울자.”
설마, 아무리 사기꾼이라도 아직 어린 형님에게 사부님이 당할 리가 없지 않은가. 진심으로 당황한 것 같은 그 어투에 태미는 결국 울음처럼 웃음을 지었다. 홍대홍은 그것도 모르고 애가 갑자기 더 부들거린다며 어디가 또 아픈 건 아니냐고 홀로 혼잣말을 해댄다. 태미는 꼭 붙잡았던 그 옷깃을 놓고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잠깐의 시간이 지나자 어느 정도 진정되었는지 훌쩍거리는 소리만 들린다. 홍대홍은 안심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어이구, 내 팔자야.”
한탄하는 듯한 홍 사부의 모양새가 또 우스워서 태미는 핏하니 웃음을 흘렸다. 홍대홍은 그제야 태미가 웃었다는 걸 알고는 노발대발하며 얼른 내리라고 성을 낸다. 태미는 개구지게 웃으며 그 목을 꽉 끌어안았다. 덕분에 홍대홍의 한숨은 늘어만 갔다.
집으로 돌아온 둘은 땀으로 흠뻑 젖은 선미와 마주쳤다. 태미가 걱정되어 한참을 이리저리 뛰어다니다 저리된 것이 선하다. 홍대홍은 얼굴을 구기고 혀를 찼다. 밥을 먹기 전에 일단 씻기기부터 해야 할 태세였다. 한숨을 쉬던 홍대홍은 비어 있는 선미의 두 손을 보곤 이상함에 고개를 갸울였다.
“근데, 그건 어디 갔냐.”
뒤늦게 선미에게 시킨 심부름이 생각난 홍대홍이 묻는다. 선미는 숨을 고르며 의아한 표정으로 홍사부를 보았다. 그거. 그거 말이다, 그거. 내가 시킨 심부름. 홍사부가 다시 말한다. 선미가 여전히 알지 못하겠단 얼굴이자 보다 못한 태미가 빽 외쳤다.
“고기말야, 고기.”
선미가 그제야 깨달은 표정을 지었다. 아, 하고 벌어진 입이 대답 없이 벙긋거리다 닫혔다. 제대로 된 답 없이 묵묵부답한 그 모습에 홍대홍이 머리를 쥐고, 태미는 새빨갛게 얼굴에 열을 올렸다.
“설마 까먹은 거야? 어? 이씨, 길선미! 고기 어디 갔어! 내 고기이!”
선미는 뚱한 얼굴로 툭하니 뱉었다.
“뭐가 예쁘다고 널 주냐?”
“뭐라고?”
가시 박힌 선미의 말에 태미가 울컥한 얼굴로 선미에게 달려들었다. 우씨. 괜히 걱정했네. 완전 팔팔하잖아. 한숨을 쉬며 선미는 돌아섰다. 그 혼잣말을 들은 홍대홍만이 날뛰는 태미를 가까스로 붙잡고 울상을 지을 뿐이다. 어휴, 이놈의 자식들. 또 이 일대를 아주 얼마나 엉망으로 만들려고.
며칠 뒤 선미는 저작거리에서 고기 몇 근을 얻어다가 홍 사부의 집으로 돌아왔다. 실은 저번에 잃어버린 고기를 대신할 것을 구하기 위하여 근 며칠 간 고생을 조금 했다. 아우인 태미보다 한 시진을 빨리 일어나 새벽같이 나무를 해다 팔아, 그 돈으로 이 고기를 사기 위해서였다. 그때에는 훨씬 못 미치는 양이지만 선미는 그래도 슬쩍 웃음이 났다.
매일같이 왜 먼저 나가버리냐고 툴툴대었던 아우의 음성이 귓가를 스치고, 이를 보며 좋아할 그 얼굴이 떠오른다.
조금 더 달라며 실랑이하느라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태미라면 전처럼 뒤뜰에서 수련을 하고 있을 터였다. 그래 봬도 승부욕이 강한 아우님이니까……. 생각하던 선미는 이내 싸하게 얼굴을 굳혔다.
요 며칠 홍사부 덕분에 잊고 있었는데, 본디 어릴 적부터 저가 없을 때마다 태미는 항상 아이들의 놀림에 시달리고는 했다. 그래서 어릴 적엔 투닥거리면서도 저가 항상 붙어 있곤 했었는데 홍사부에게 맡겨진 뒤로는 굳이 신경 쓸 필요가 많이 없었다. 왜냐면 저 아니면 홍사부 둘 중 하나는 꼭 태미와 함께였으니까.
그런데 홍사부는 바로 어제, 어딜 다녀오겠노라 내일 즈음에나 돌아온다 하셨으므로 오늘 안 계신단 말이다.
그러니까 그 말은 즉 지금 태미가 혼자 있다는 말.
사색이 된 얼굴로 선미의 발이 땅을 박찬다. 홍사부와 함께한 며칠이 조금 안전했다고 자신이 너무 모든 것을 간과해버린 것은 아닌가, 자신을 탓하며 선미는 일그러진 얼굴로 입술을 지르물었다.
제발. 제발 오늘만큼은 태미가 사부 집에 꽁꽁 틀어박혀 있기를.
선미는 저가 무엇을 들고 있었는지도 잊고 달음박질 쳤다.
“태미야! 길태미!”
헉헉 가쁜 숨을 쉬며 뒤뜰을 뒤진다. 불길하던 예상 중 하나가 적중했다. 태미는, 오늘도 목검을 들고 수련을 나선 것이다.
‘맨날 귀찮다 귀찮다 하니까 실력이 안 느는 거야.’
짜증스럽게 툭하니 뱉었던 과거 자신의 말을 떠올리며 선미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런 말 하지 말 것을. 그냥, 그냥 자신이 지켜주면 되었던 게 아닐까.
“길태미! 들리면 대답-.”
빽 소리치는 선미의 귓가에 낯설지 않은 소리가 들려온다. 깔깔대는 웃음소리, 그리고 익숙한 단어들.
“계집애 같은 게. 뭐하러 검을 배워? 제대로 쓰지도 못할 거면서.”
우뚝 멈춰선 선미의 고개가 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휙 돌아갔다. 저 멀리, 사내애들 몇이 누군가를 둘러싸고 있는 것이 보였다. 선미는 숨이 멎었다.
“길태미.”
익숙한 체구의 소년, 태미가 바닥에 엎어져 아이들의 발길질에 그대로 당하고 있었다. 작게 읊조리는 선미의 음성을 누군가 들었을까. 소년을 둘러싼 아이들 중 하나가 고개를 든다. 마주한 까만 눈동자에 선미는 머리뚜껑이 회까닥 열렸다.
“어? 뭐야.”
아이는 웃고 있었다. 웃으며, 선미의 얼굴과 제 발치에 엎어진 태미의 얼굴을 한 번씩 바라본다. 그리곤 들뜬 음성으로 옆의 친구들에게 말했다.
“얘 형 왔다.”
“어? 진짜네. 진짜 똑같이 생겼다.”
“근데 왜 이렇게 느낌이 달라?”
“야야, 가자.”
그들 중 한 아이가 말렸으나 소용없었다. 그들의 눈가에는 이미 즐거운 기색이 한가득이었다. 선미 저 자신보다도 한 뼘은 더 큰 사내애들 두엇이 하나둘 걸음을 뗀다. 씩 웃는 입매가 무척이나….
“혹시 알아? 얘도 이렇게 비실비실할지?”
기분이 나빴다. 선미가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저를 향해 다가오는 그들 뒤로 상처투성이의 태미가 보인다. 이를 악물고 선미는 지니고 있던 목검을 빼어들었다.
잠시 정신을 잃었던 태미의 귓가로 뜨문뜨문 난잡한 소리가 들린다. 분명 누군가를 때리는 소리인데 맞는 이가 누군지 모르겠다. 제 몸이 아프진 않으니 저는 아닐 테고……. 멀었던 정신이 돌아오는 사이 가만히 생각해보던 태미는 재빨리 눈을 떴다. 아이들의 비웃음 소린 들리지 않았다. 순간 콕하니 박혀든 형님, 선미의 신음이 태미를 번쩍 정신 차리게 했을 뿐이다.
“혀. 형.”
선미가 분명하다. 대체 언제 온 거야. 아니, 왜 하필 지금 와서 나처럼 맞고나 있냔 말이야. 어지러이 흔들리는 시야를 무시하고 태미는 주변을 더듬더듬 짚었다. 아까 떨어뜨린 목검이 어디 있을 텐데. 땅 위를 훑는 그 두 손에 부러진 목검의 손잡이와 날이 잡힌다. 이것으로 온전히 싸울 순 없겠지만,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태미는 저가 이리 달려들어 봤자 이길 수 없단 것을 알면서도, 이를 악물고서 눈앞의 무리에게 달려들었다.
“길선미! 일어나 빨리!”
태미가 기절한 줄 알고 무방비상태로 등지고 있던 아이들은 태미의 목검에 하나둘 나가떨어졌다. 저보다 훨씬 어린 아이의 힘이 세면 얼마나 세겠냐마는, 갑작스런 타격에 당황하여 아이들 두엇이 엉덩방아를 찧는다.
“이씨, 뭐야! 너 이 자식 가만 안 둬!”
역시나, 아이들은 큰 타격을 입지 않은 듯 성이 난 표정으로 벌떡 일어섰다. 땅바닥에 누워 숨을 고르던 선미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태미가 후다닥 그 앞에 서서 양 손에 부러진 목검을 들어보였다.
“가까이 오기만 해봐! 이걸로 확 눈을 찔러버릴 거야!”
그렇게 말하며 들어 보이는 손은 파르르 떨려오고, 치뜬 두 눈은 울상으로 일그러져 있다. 아이들에겐 그 모습이 전혀 위협적이지 않았기에 그런 태미에게 쏟아진 것은 그저 비웃음뿐이었다.
“야, 개미도 못 밟아 죽이는 게!”
아이들 중 하나가 주먹을 말아 쥐고 위협적으로 허공에 흔들어 보인다. 태미는 잠시 움찔했지만 그게 다였다. 어느새 완전히 일어선 선미가 태미의 어깨를 짚고 속삭였다.
“태미야. 그거 알지. 얼마 전에 사부가 알려준 거.”
손가락이 하얗게 질릴 정도로 온 몸에 힘을 주고서 굳어 있던 태미는 갑자기 들린 음성에 고개를 돌렸다. 저와 마찬가지로 땡땡 부은 두 눈이 우스울 법도 하건만 태미는 웃을 수가 없었다. 마주한 선미의 눈동자에 태미가 고개를 끄덕인다.
“할 수 있어. 자. 하나둘셋 하면 내가 짚을게. 네가 돌아. 그리고, 검을 휘둘러.”
“부, 부러졌는데?”
“…그냥 눈 딱 감고 아무렇게나 휘둘러. 그냥 칼 하나 더 생겼다고 생각해.”
아이들을 경계하듯 다시 앞을 보는 태미에게 선미는 재차 속삭였다. 덜덜 떠는 태미가 걱정되었지만 선미는 믿었다. 아니, 믿는 수밖에 없었다.
“자, 셋 센다.”
하나, 두울. 숫자 읊는 소리가 이어지고 태미는 저도 모르게 양 손의 검을 고쳐쥐고, 다리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셋!”
힘차게 외침과 동시에 선미는 모은 양손을 있는 힘껏 위로 쳐올렸고, 태미는 그 손을 발돋움하여 공중으로 떠올랐다. 휘휘 허공에서 두어 바퀴 돌며 양 손의 검을 사방으로 휘두른다. 선미의 힘도 제법 되었거니와 태미의 체중이 비교적 가벼웠던 탓도 있었다.
태미는 제 키의 배는 될법한 높이를 뛰어올라 저보다 머리 한 통은 더 큰 아이들의 뒤통수며 어깨, 등을 목검으로 쳐내었다.
선미의 힘에 더불어 태미의 하중까지 더해져 사내애들 네 명이 순식간에 바닥으로 나동그라졌다.
헉헉 숨을 고르며 태미는 멍하니 제 손을 바라보았다.
“형… 나…….”
“잘했어.”
파르르 떠는 태미의 머리를 헤집으며 선미가 씩 웃었다. 피투성이의 얼굴이 씩 웃자 태미는 울컥하여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말았다.
아이들이 도망가고 나서야 선미와 태미는 완전히 정신을 추슬렀다. 태미는 뒤늦게야 저가 만들었던 꽃반지를 떨어뜨렸었단 것을 깨닫고 휘휘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이리저리 발치를 살피던 태미가 어느 한 곳에 멈춰 선다. 조심스럽게 쪼그려 앉는 태미의 모습을 선미는 묵묵히 내려다보았다. 태미의 발치에는 노란 꽃과 흰 꽃으로 만들어진 두 개의 꽃반지가 놓여 있었다.
“꽃반지냐?”
굳어있는 태미 옆에 나란히 앉으며 선미가 물었다. 태미는 멈추었던 손을 움직여 머뭇머뭇 다시 꽃반지를 주워들었다. 그런 태미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선미는 잘 만들었네, 하고 칭찬을 덧붙였다. 그러자마자 태미의 얼굴에 옅은 화색이 돌았다. 정말? 되묻는 그 물음에 설렘이 담겨있다. 응, 선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태미가 아주 환하게 웃었다.
“형님. 그럼 형님은 둘 중에 어떤 게 더 예뻐?”
조금만 기분 나빠도 ‘야야’거리는 아우님인데, 기분이 조금 나아졌나보다. 금세 형님이라 부르며 환한 얼굴로 묻는 그 모습에 선미는 태미의 양손으로 시선을 옮겼다.
깜빡. 선미는 눈을 감았다 뜨길 반복하며 태미의 양 손바닥 위에 얹어진 노란 꽃반지와 흰 꽃반지를 번갈아보았다. 고민하는 선미의 모습에 태미가 말한다.
“마음에 드는 거 하나 줄게. 형님 하나 나 하나 끼자.”
그 말에 선미는 하얀 꽃으로 시선을 주었다. 왠지 노란 것은 저보다는, 더 어여쁜 마음씨를 가진 태미와 잘 어울릴 것 같다. 선미의 시선이 태미의 말간 미소에 닿았다. 흰꽃반지를 낀 채 웃는 모습과, 노란 꽃반지를 낀 채 설레어하는 모습이 떠오른다. 선미의 손이 이내 태미의 손 위에 닿았다. 형님의 손이 흰 꽃반지를 집어 들자 태미는 더없이 환한 얼굴로 웃었다.
“역시 형님은 그거 고를 줄 알았어.”
태미는 신이 나서 형님과 함께 나누어 낀 꽃반지를 맞대었다. 태미의 입가에선 미소가 떠나갈 줄 몰랐다. 태미를 따라 선미도 씩 웃음을 지었다. 태미가 신난 표정으로 제 손에 낀 꽃반지를 만지작거린다. 지레짐작으로 흰 꽃을 골랐으나 정답이었던 모양이었다. 안도한 마음에 선미는 상기된 태미의 얼굴을 빤하게 바라보았다.
가만히 바라보기만 하는 선미의 시선이 느껴졌는지 태미는 고개를 갸울였다.
"왜?"
태미의 눈동자를 보며 선미는 다짐하듯 입을 떼었다.
“우리 강해지자.”
다짐하듯. 그리고 또 다짐하듯. 선미의 말에 멀거니 마주보기만 하던 태미가 다시금 웃음을 머금는다.
“강해지자, 우리.”
“그래, 그러자, 형님.”
태미의 대답에 선미는 안심하며 마주 웃었다. 그래, 그러면 그 누구도.
“아, 맞다.”
고기 까먹었네. 멀거니 중얼거리는 선미의 음성에 태미가 고개를 갸울였다. 뭐라고? 뭐라고 했어? 되묻는 그 음성에 선미가 고개를 저었다. 장작 캐는 일을 며칠 더 해야 할 것 같다.
그 일이 있은 후, 태미는 여전히 어여쁜 것을 좋아했지만 수련하는 것도 좋아하기 시작했다. 그럴수록 실력은 나날이 좋아졌고, 이제는 태미 홀로 두어도 웬만한 장정 한둘은 거뜬할 정도. 선미는 안심이 되다 못해 사실은, 조금 귀찮아졌다. 요즘에 홍사부가 서로 대련을 시키기 시작하여 슬슬 둘의 격차가 눈에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즉, 선미는 태미의 질투를 아주 한 몸에 받게 되었단 말이다.
먹성 좋은 태미 때문에 아침마다 일찍 일어나 나무나 사냥을 하곤 했던 선미는 같은 수련을 하는 태미에 더불어 힘까지 좋아졌다.
이젠 그릴 필요도 없어 보이지만. 선미는 힐끔 태미를 바라보았다. 태미가 달라붙은 중년의 사내. 아비의 말을 들어보나 아우의 말을 들어보나 저희들을 후원해주기 위해 손을 내민 아주 착한이라 했다. 그러나 선미는 왠지 마음 한 켠이 켕겼다. 잠시 한눈파느라 멈춘 검을 고쳐 쥐며 선미가 숨을 골랐다.
“길태미. 대련하자.”
울컥하여 선미가 말했다. 무어가 그리 기분이 상했을까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갑자기 생뚱맞은 선미의 말에 태미가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뭐? 왜 지금-.”
“빨리.”
선미가 인상을 찡그리자 태미는 짜증내며 걸음을 떼어 선미에게 다가온다. 절로 벌어지는 사내와 태미 사이의 거리를 보며 선미는 표정을 풀었다가 이내 와락 구겼다.
“아, 알았어. 합하! 보고 계셔야 돼요!”
저 호들갑, 진짜. 까득 이 가는 소리가 선미의 귓가에 울린다. 한 손에 쥔 목검이 부들부들 떨렸다. 괜스레 짜증이 나서 선미를 태미가 준비할 시간도 주지 않고 목검을 겨누었다.
“야, 길선미. 왜 그래 진짜!”
우이씨, 아까부터 자꾸 거슬리는 선미의 태도에 태미 또한 심통 난 얼굴로 검을 들었다. 선미가 기다렸단 듯이 검을 휘두른다. 평소 대련할 때보다 빠르고 강한 검. 일순 당황했으나 태미는 곧 평정을 되찾고서 그 공격을 똑같이 되돌려주었다.
같은 검법, 이제는 많이 비슷해진 체구. 얼마 전까지만 해도 태미의 몸집이 좀 더 작았으나 이제는 둘 모두 제법 또래답다 볼 수 있는 튼튼한 체구가 되었다.
닮았다면 닮았고, 다르다면 다른 두 쌍둥이를 가만히 지켜보던 사내, 이인겸은 곧 몸을 돌렸다. 끝까지 지켜봐주고는 싶지만 자신은 할 일이 남았다. 그리고, 결판은 이미 난 것 같고 말이다.
“길선미, 너어! 나 진짜로 베려고 했지! 야! 대답 안 해? 야-!”
이제는 제법 멀어진 초가 너머로 쩌렁하게 울리는 익숙한 음성에 인겸은 소소하게 웃음 지었다.
“왜 네가 맨날 지는지 알려줄까.”
합하네 놀러가겠다며 찡찡거리는 바람에 갔다가 얼마나 성장했는지 자랑하겠답시고 대련하고 난 뒤 지속적으로 시달린 태미의 칭얼거림에 듣다 못한 선미가 뱉은 말이었다. 사부의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저작거리를 지나던 태미의 걸음이 우뚝 멈춘다. 선미는 마주친 아우의 눈을 보며 입을 떼었다.
“검을 휘두를 때 아직도 머뭇거리잖아. 한 방에 베어야지.”
그렇게 무른 검으론 아무것도 지킬 수 없을 거야. 단호하게 말하려던 선미는 시무룩해진 태미의 표정에 뒷말을 삼켰다. 그러나 한참이 지나도 꿀 먹은 벙어리처럼 가만있는 그 모습에 선미가 답답하여 물었다.
“다른 애들한테 하는 것처럼, 나한테도 하면 되잖아.”
다그치듯 말하자 태미는 그제야 머뭇거리며 입술을 뗀다.
“그래도.”
그래도 뭐. 따지고 싶은 마음을 굳게 참아 넘기며 선미는 태미의 말이 모두 끝나길 기다렸다. 대체 무슨 변명이 그 입에서 나올지 두고 볼 참이었다. 태미는 뻐끔거리던 입을 잠시 다물었다가 떨구었던 시선을 들었다. 마주한 태미의 눈동자엔 수심이 담겨 있었다.
“그래도 어떻게 형님을 베.”
진짜로 벨 순 없잖아. 형님도 나 못 베면서. 꿍얼대듯 기어들어가는 그 변명에 이번엔 선미의 입이 다물렸다. 지금 누가 누굴 걱정하는 거야. 당연한 것 아니냐는 듯 비죽 튀어나온 태미의 입술이 선미는 처음으로 얄미워졌다.
합하. 합하. 합하. 그놈의 합하! 선미는 진절머리가 날 지경이지만 한숨을 쉬어 넘기고 사부의 집을 나섰다. 아버지는 이제 아예 저희들 얼굴을 보러 오지 않을 작정인 것 같았다. 합하란 그 작자에게 얼마에 팔아넘겼는지 모르겠지만 마지막으로 보았을 적에 그 안색은 아주 훤하였다.
이렇게 기분이 안 좋은 것은, 아버지를 보고픈 마음이 들었다거나 하는 같잖은 이유는 아니었다. 다만, 제 아우의 마음을 사로잡아 제 수족처럼 부리는 합하라는 작자가 마음에 안 들 뿐이다.
위험해보여서 어떻게든 안 얽히게 해볼랬더니만 아주 지랄발광을 해대서는. 선미는 엊그제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저었다.
‘이제 넌 네가 알아서 해라. 나도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뭐? 야, 길선미. 넌 은혜도 모르냐? 아버지랑 합하가 나보다 널 믿었던 걸 알면서-.’
딱 자르는 제 말에 기함하던 아우의 음성이 들려오는 듯하다. 선미는 아무렇지 않은 척 덧붙였다.
‘호위가 됐다.’
‘그- 뭐?’
‘궁에 들어가야 해.’
벙 찐 태미가 입만 벙긋벙긋하는 사이에 선미는 제 할 말만을 하고서 태미를 등졌다.
‘잘 있어라.’
밥 잘 챙겨먹고, 하는 괜한 말은 삼켰다. 선미는 태미의 방에서 나와 곧장 제 방으로 향했고 필요한 짐을 간추려 봇짐에 싸두었다. 태미는 저를 잡지도 않았다. 하긴 갑작스러울 테니 당황했겠지.
잘 있으란 말에 대꾸도 듣지 못하여 찜찜했지만 선미는 괘념치 않기로 했다. 언젠간 또 보겠지 싶었다. 그 합하란 자도 제법 궁에서 중요한 인물인 것 같으니.
“스승님.”
“오, 그래. 왔냐.”
반가운 기색으로 맞이하는 홍대홍에 선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태미 이 녀석은 저번 일 이후로 코빼기도 안 보인다느니, 그래도 저가 스승인데 너무한 것 아니냐느니 아주 귀가 따가울 정도로 이야기를 늘어놓는 홍 사부를 무시하고 선미는 덤덤하게 내뱉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그래도 너라도 와서… 엉?”
꾸벅 절을 하고 일어나려니 덩달아 얼떨떨하게 절을 하고 있는 홍 사부가 보인다. 선미는 긴말 않고 간단하게 설명했다.
“궁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궁?”
“예. 노국공주의 호위무사로.”
“뭐? 누구? 누구라고?”
“그럼.”
짧게 이야기를 마치고 돌아서는 선미의 등 뒤로 홍사부의 음성이 이어진다. 선미야, 태미한테는 말 한 게냐? 그럴 줄 알았다. 너라면 그냥 생 까고 그냥 그렇게 동생도 버리고 말이야. 응? 그래도 동생인데! 대답도 안 했건만 구구절절 늘어놓는 이야기에 선미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 걸음을 빨리했다.
“그래도 태미한테만큼은 나 이제 간다, 인사라도 하고 가야하는 것 아니냐!”
들려오는 그 음성에 마음이 켕겼던 것은 홍대홍의 말이 너무나 정신없고 시끄러웠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 말대로 아우와 제대로 된 인사를 주고받지 못했기 때문일까.
‘이제 넌 네가 알아서 해라. 나도 내가 알아서 할 테니.’
그도 아니면, 너무 모진 말을 해서일까. 지금이라면 돌아가서 다시 인사를 하고 떠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선미는 한 번 뗀 걸음을 멈추지는 않았다.
그 후로 선미와 태미는 완전히 다른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것이 가속화 된 것은 ‘노국 공주’가 이승을 떠났을 때.
주인을 지키지 못한 호위는 어떻게 될 것인가. 당연히 처벌받아 마땅하지 않겠는가. 수많은 이야기들이 나왔으나 정작 당사자인 그 호위 ‘길선미’는 돌연 모습을 감추어 찾을 수가 없었다.
그를 찾을 수 없던 것은, 그의 쌍생인 길태미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로부터 몇 년이 흘렀을까. 선미는 수많은 인파너머 아우님의 얼굴을 보았다. 보자마자 역시 아우답다 싶었다. 허나 못 본 새 얼마나 많은 일이 있었을 겐가. 마치 지난 세월을 되새기듯 태미의 눈꺼풀은 감았다 뜨이길 반복했다. 그것은 선미 또한 마찬가지. 듣지 않아도 아우의 마음이 여기까지 들려오는 듯했다.
내가 무얼 그리 잘못했는데.
서서히 몰려드는 한계에 이를 악문다. 날씨가 쌀쌀하여 그런가 눈가가 시큰거렸다. 감겨오는 눈을 치뜨며 선미는 똑바로 태미를 응시했다.
피 칠된 태미의 손이 검을 그러쥔다. 잘 벼려진 칼끝으로 땅을 짚고 몸을 지탱하며 태미는 일어섰다. 비틀거리며 간신히 일어서는 모습이 안쓰러웠다. 하지만 다가갈 수도, 나설 수도 없었다.
기어코 그를 향해 낯익은 기운의 사내가 검을 겨누었다. 동시에 여기저기서 태미를 탓하는 사람들의 원망 서린 음성이 들려온다. 양 손의 검을 고쳐 쥐며 태미는 발을 내딛었다.
나는, 잘못한 거 없어.
선미는 입술을 지르물었다. 아우의 음성이 제 귓가에 분명히 들려온다. 태미의 양손에 힘이 들어갔다. 한 치 밖으로 물러나 서서히 자세를 낮추는 상대의 모습을, 선미는 떨리는 눈으로 지켜보았다. 얼핏 마주친 태미의 눈동자가 무언가를 말한다. 움찔하는 것을 막느라 뻣뻣하게 굳은 몸에 힘을 풀며 선미는 떨리는 숨을 삼켰다. 깜빡 눈이 감긴다. 다시 억지로 떴다.
탁, 태미의 발이 떼어지고 그 양손의 검이 허공을 갈랐다. 그것을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던 상대가 그제야 서서히 칼자루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선미는 그 모습을 모두 지켜보았다.
사내의 몸이 움직이는 것과 그 칼자루가 어디를 향하는지까지, 모두.
베고, 베고, 또 베고.
이미 많은 피를 흘려 지친 태미와는 달리 사내는 빠른 속도로 검을 휘둘렀다.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태미의 몸을 스치고 지나간 그의 검은 기어코 태미의 목을 베고서야 멈추었다.
검이 스칠 때마다 힘을 잃고 흔들리던 태미가 뒤늦게 왈칵 피를 토하며 목을 붙잡았다. 끝내 쥐고 있던 검을 놓치고 두 손 가득 상처를 그러쥔 채 힘껏 눌렀다. 입 밖으로 토해지는 것보다 많은 피가 상처로부터 새어나오고 있었다. 목울대까지 차오른 피가 상처서부터 나온 것인지 아니면 몸 속 내상서부터 나온 것인지 알 수 없다. 그의 눈이 핑 돌았다.
선미는 어느 순간 막혔던 숨통이 그제야 탁 트이는 것을 느꼈다. 숨을 고르고 가만히 아우를 보았다. 왈칵 토해지는 핏물을 무시한 채 태미의 입술이 열린다.
“이름이… 뭐냐.”
그가 피를 토하는 것인지 말을 뱉는 것인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 말을 하면 할수록 그 상처는 벌어졌고, 바라보는 이의 고통은 더해졌다. 제 목이 다 아파올 지경이라 선미는 주먹을 그러쥐어야 했다. 떨리는 시야를 꾹 감았다가 뜬다. 동시에 달싹이는 태미의 입에서 떠듬떠듬 알아듣기 힘든 음성이 새어나왔다.
“누구한테 죽었는진, 알고 가야될 거 아냐…….”
입안까지 피가 차올라 이번엔 더욱 알아듣기 힘들었다. 하지만 그 여전한 고집이 느껴졌다. 이대로 무턱대고 죽임을 당하긴 싫다는 아우의 마지막 고집.
만약 저자에게마저 무시당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끝까지 짓밟힘 당하는 삶이 아니겠는가.
“난-.”
다행히도 천천히 열리는 사내의 입을 보며 선미는 잘게 숨을 내쉬었다.
“‘삼한제일검’ 이방지!”
그동안 담고 있던 것을 토해내듯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지는 사내의 목소리. 아우의 얼굴에서 서서히 사라져가는 생기. 상처 위를 움켜쥐던 태미의 손에서 힘이 빠지고 스르륵 그 몸이 무너진다.
이방지. 그래. 삼한, 제일검.
선미는 작게 웅얼거리며 땅 위로 엎어지는 태미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동시에 땅이 울릴 만치 커다란 환호성이 사람들 틈에서 물결처럼 퍼져간다.
아우님.
차마 그 모습을 오래도록 바라보지는 못하겠어서 선미는 결국 고개를 돌렸다. 그래도 다행히 마지막은 탐관이 아니라-. 질끈 감은 시야 속, 말로는 뱉지 못했던 바람을 되뇐다.
다음 생엔 부디.
감은 눈 사이로 옛 기억이 새록새록 피어났다. 선미는 벌어진 입새로 잠시 숨을 삼켰다.
‘태미야. 우리 강해지자.’
그 말에 환하게 웃던, 저를 닮은 태미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아우님. 아우님은 무얼 그리 원하시어 탐관이 되셨는가. 저 멀리 쓰러진 태미를 보며 물어보지만 돌아오는 답은 없다.
‘강해지면, 그러면…….’
그러면 그 누구도 무시하지 못할 거라 생각했던 때가 있었지. 선미는 머리에 쓴 갓을 고쳐 쓰고 걸음을 옮겼다. 서로를 등지며 지내길 몇 년인가. 이제는 쌍둥이라 하기엔 너무나도 다른 길 위에 서있게 되었지만 그래도 그는 자신의 아우였다. 선미는 혹여 아우님 가는 길 외로울까, 지난 세월을 떠올리며 홀로 속삭여보았다.
그래, 하늘을 수놓던 새하얀 눈꽃은 보았는가.
‘그래도, 어떻게 형님을 베.’
대련할 때마다 흔들리는 칼끝에 의아한 듯 묻자 돌아왔던, 울먹이는 아우님의 음성이 선미의 귓가에 머무른다.
세월은 많은 것을 바꾸어놓았고 많은 것을 삼키었다. 그 중엔 자신과 어린 아우도 있었다.
부디. 이젠 편히.
선미는 떠오르는 추억을 까만 어둠 속에 눌러 담았다. 져버린 꽃 하나를 가슴에 묻고 다시 길을 나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