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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건10 (윌라드, 마틴)
    사이퍼즈 2014. 11. 25. 22:09

    [사이퍼즈]

     출연 : 윌라드 크루그먼, 마틴 챌피.

     조건 : 어린 마틴을 데려다 교육시키고 키운 윌라드. 마틴이 성장하여 기어코 윌라드보다 더한 직위에 올라섰을 때, 윌라드는 지는 꽃일 뿐. 숨이 끊어져가는 윌라드에게 마틴은 듣고 싶은 것이 있다.


     그는 항상 저를 ‘마틴 챌피’라고 불렀다. 아주 어릴 적부터 보아왔던 저인데도 그는 그렇게 거리를 두듯 딱딱하게 저를 불렀다. 그게 못마땅하진 않았다. 그렇게 거슬리지도 않았고, 게다가 부드럽게 불러주는 것을 바라마지않았던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게 당연한 줄 알았다. 마틴은 그래서 ‘그’, 당신을 볼 때마다 덤덤했다.

     근데 지금은, 하나 묻고 싶은 것이 있다. 마틴의 눈동자가 한 곳을 향한다. 익숙한 머리칼, 낯이 익은 모양새가 그의 눈에 들어왔다. ‘윌라드 크루그먼.’

     “당신은 왜.”

     그게 당신, ‘그’의 이름이었다. 건조했던 마틴의 표정이 서서히 변한다. 지금까지는 묻고 싶지 않았던 것, 그러나 이제는 꼭 물어야겠는 그것. 마틴은 잠시 말을 멈추고 숨을 골랐다.

     “왜 그때, 하고많은 아이들 중에 나를 택했습니까?”

     목소리가 떨리는 것이 느껴진다. 마틴은 금세 다시 입을 다물었다. 다물린 입술이 잘게 떨렸다. 쓰러진 윌라드의 뒤통수를 마틴이 서슬 퍼런 눈으로 쏘아보았다. 가지런했던 그의 머리는 비참하게 헤집어져 있을 따름이다. 마틴은 한참이나 그를 바라보다 몸을 숙였다. 가는 숨소리가 한층 더 가까워졌다. 바닥에 널브러진 그의 머리칼을 향해 손을 뻗는다. 손끝에 잡히는 머리칼의 느낌이 나쁘지 않았다. 마틴의 입술이 다시 한 번 떼어졌다. 물음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아직 묻고 싶은 것은 많았다. 마틴의 뇌리에 두 아이들이 스쳐지나갔다.

     “당신, 지금 그 아이들에게도 나에게 하듯 대했습니까?”

     빅터와 카를로스라고 했던가. 마틴이 속으로 비웃음을 삼켰다. 저와는 달리 당신의 생각을 읽을 수 없는 어리석은 아이들이다. 그리고 저처럼 당신을 스쳤던 수많은 아이들 중, 유독 당신의 눈에 들어 당신에게 선택되어 당신의 손을 잡게 된 ‘기특한 아이’들일 테고 말이다. 마틴의 입꼬리가 말렸다. 언제나와 같은 어여쁜 소년의 웃음이었다. 그러나 비틀린 그 웃음은 어딘가 부서져 있었다.

     “그래서 그 아이들도, 지금의 나와 같이 이렇게…….”

     당신을 밟아 죽이고 싶을 만큼, 아주 잘 키워낼 작정이셨나요? 내뱉지 못한 그 말이 입 안을 맴돈다. 이 생의 것이 아닌 것만 같은 희미한 숨결이, 마틴의 손끝을 타고 올라왔다. 그 머리칼을 조금 더 움켜쥐고, 마틴은 손에 쥔 머리를 끌어올려 제 얼굴과 높이를 맞추었다. 익숙하디 익숙한 당신의 얼굴. 마틴의 입술이 다물렸다.

     그래서, 그렇게 해서 기어코 이 땅에서 자신의 존재 자체를 아예 없애버릴 셈인 겁니까?

     격한 물음은 삼켰다. 그것 말고도 묻고 싶은 것은 많았기 때문에, 차근차근 묻고 싶었기 때문에… 아니, 어차피 들을 수 없는 답임을 알기 때문에. 마틴의 눈이 하염없이 감겨진 윌라드의 눈꺼풀을 보았다. 당신의 차가운 눈동자를 이렇게 마주한 채로 직접 따지고 묻고 싶었는데 한참이 지나도 그 눈은 뜨일 생각을 않는다. 마틴은 손에서 차츰 힘을 놓았다. 스르륵 풀리는 그 힘을 견디지 못하고 그 손가락 사이로, 허공으로 그의 머리칼이 맥없이 흩어져간다. 마틴은 그와 같이 눈을 감았다. 가늘게 머릿속을 파고들던 잡음이 멀어진다.

     순간 익숙한 감각이 마틴의 뇌리를 스쳤다. 그것은 찰나였고 아주 미세해서 마틴은 제 본능적인 행동을 막을 수 없었다. 순간적으로 놓았던 손을 뻗어 그를 필사적으로 끌어안은 마틴이, 그제야 왈칵 참았던 말을 토해낸다.

     “당신은 왜.”

     내 능력을 그렇게나 잘 알고 있으면서.

     “당신은 왜, 내가 당신의 본심을 알아채지 못할 거라고…….”

     턱하니 막힌 무언가에 마틴의 음성이 채 끝을 맺지 못하고 끊어진다. 목에 메인 무언가를 삼켜낸 그가 다시 말을 이었다.

     “아니면. 이것조차, 당신의 작전인 겁니까?”

     원망스러웠다. 마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렇다면 완벽하게 성공했으니 이제 눈 좀 떠보십시오.”

     자신을 여기까지 이끌고 온 당신이 정말로 원망스럽다. 일그러진 마틴의 입가가 파르르 떨렸다. 순식간에 가빠진 숨을 고르며 그 답을 기다려보지만 돌아오는 신호하나 없다. 마틴이 크게 숨을 들이켰다. 

     “제발 그 눈을 떠 나를 보며 ‘이게 전부 당신의 작전이라’고. 이것조차 나를 당신의 뜻대로 조종하고, 키우기 위함이라고. 제발 그 눈을 떠서, 그 차가운 눈으로 날 쏘아보며 얘기해!”

     턱을 타고 무언가가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날 무시하듯, 하찮단 듯이 대하며, 날, 보아달란 말이야. 당신 ‘책임’ 좋아하잖아? 그러니까 날 이렇게 만들었으면 끝까지 책임을 지라고, 윌라드 크루그먼!”

     쉬어버린 마틴의 목소리가 듣기 싫은 소리를 내며 그 입 밖을 터져 나왔다. 희미한 잡음이 그의 머릿속을 파고든다. 마틴의 숨이 멈추었다.


     속절없이 흘러드는 사념들이 아이를 넋 놓게 만들었다. 아니, 넋을 놓은 척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며 생을 연명했다는 것이 정답이다. 인간의 악하고 약한 단면을 일찍이 파악하게 된 아이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그것을 보기 좋게 이용해먹는 것뿐이었다. 그래. 방금도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우연히 마주친 사람들’에게 ‘본의 아니게’ 연민을 가득 사서 당분간의 의식주를 잔뜩 뜯어낼 생각이었는데 말이다.

     아이, 마틴의 눈이 깜빡 감겼다가 떠졌다. 무미건조한 눈동자 한 쌍이 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흘러드는 사념파는, 여느 사람들과는 조금 다르다. 사나운가? 잘 모르겠으나 마틴은 약간의 흥미가 동했다. 다행히 그 당사자 또한 아이에게 관심이 있었던가, 그 사내는 마틴을 빤히 바라보다가 제 겉옷을 뒤집어 씌웠다. 아니, 어찌 보면 그 딴엔 이 추운 겨울에 아이가 맨살로 나와 있으니 내보인 아주 당연한 친절일 수 있겠으나……. 제대로 챙겨 먹지 못해 빼빼마른 아이의 몸에, 갑작스레 장신인 사내의 두툼한 겉옷이 걸쳐졌으니 ‘뒤집어씌워졌다’할밖에. 물론 마틴이 그 자리에서 멈춘 것은 그 때문이 아니었지만 말이다.

     무엇 때문인지 마틴이 굳어있자 사내는 그대로 마틴의 멱을 잡고 뒤돌아 걸음을 옮겼다. 정확히는 마틴의 몸에 감싸인 사내 자신의 옷깃을 꼭 여며 잡은 것이지만 모르는 사람이 보면 아이의 멱살을 잡은 것 마냥 거칠어보였다.

     마틴은 순간 자신이 착각을 했나 생각했다. 아니, 자기 머릿속에 흘러드는 사념파가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느껴지는 사념들 사이로 어렴풋이 느껴지는 하나의 음색이, 툭하고 마틴의 가슴에 멍울져 떨어진다. 덕분에 멈칫했던 마틴의 걸음이 그대로 사내의 손길을 따라 옮겨졌다. 사내, 윌라드의 손이 그제야 마틴의 멱에서 떨어졌다. 사내를 따르는 마틴의 걸음은 반항적이지 않은 순순한 걸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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