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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건9 (제레온, 벨져)
    사이퍼즈 2014. 9. 7. 18:27

    [사이퍼즈]

     출연 : 제레온, 벨져.



     “제레온 경.”

     곱씹어도 곱씹어도 예쁜 단어다. 아니, 명백히 말하자면 사람의 이름이니 단어라기도 뭣하다. 벨져가 쌉싸름하게 웃었다. 그래. 그 ‘단어’의 당사자도 ‘예쁜’ 수식어와는 어울리지 않기도 했다. 무겁게 짓누르는 눈꺼풀을 벨져는 굳게 닫았다. 잠시간의 침묵이 주변을 감싸온다.

     “제레온 경.”

     다시 한 번 그 이름을 불러본다. 눈앞에 익숙한 인영이 떠올랐다. 그래. 제레온, 경. 벨져는 눈앞의 그에 속삭이듯 말했다.

     “제가 당신을 처음 봤을 때를 기억하십니까?”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벨져는 아랑곳 않고 말을 이었다.

     “당신은 제가 고개를 들고 그 얼굴을 마주하지 못할 만치 높았습니다. 해서…….”

     잠시 말을 멈추고, 숨을 들이켜고, 어느새 마른 입안을 축였다. 닫혔던 벨져의 눈꺼풀이 천천히 들어올려졌다.

     “저는 당신이 항상 굳건할 줄로만 알았고, 무너짐이란 모르며, 그러니까.”

     턱하니 말을 잇던 그 입이 다시 멈추었다. 한참을 허공에 있던 그 입술이 파르르 떨린다. 그제야 그 입술은 다시 음성을 토해냈다.

     “좌절 같은 것은 당신에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때 당신이 어떤 표정을 하고 있었는지. 당신의 커다란 모습 뒤에 감쳐진 그 마음이 어떤 것이었는지. 그때 채 알아채지 못했던 것을, 난 지금 무척이나 후회합니다. 벨져는 다하지 못한 말을 뒤로 삼켰다. 그러며 떨리는 눈꺼풀을 억지로 붙잡고, 그를 보며, 한 걸음 그에게 다가갔다. 가까이 다가설수록 물밀 듯이 후회가 몰려온다. 만약. 벨져는 생각했다. 만약 내가. 그 누구보다 먼저 그러한 당신의 마음을 알아챘다면. 그랬다면 당신은 무사했을까.

     아니, 그게 아니라도 좋다. 벨져의 입술이 깨물린다. 꽉 쥐인 주먹에 핏기란 핏기는 사라져 있었다. 벨져가 그를 향해 조금 더 다가섰다. 한 걸음 발을 디딜 때마다, 서서히 가까워질 때마다 선해지는 그의 모습이 벨져의 가슴에 비수를 꽂았다. 조금이라도, 그러니까 정말 조금만이라도 일찍 알아챘다면 지금보다는 낫지 않았을까. 그러니까. 이렇게 당신이 완전히 무너지기 전에, 내가 어떻게든 당신을 붙잡았다면…….

     “제레온―.”

     어느새 뻗어진 벨져의 손끝이 그에게 향했다. 차가운 제레온의 체온이 그 손끝을 타고 그대로 전해진다. 벨져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그랬다면 당신이 이렇게까지 무너지진 않았을 터인데.

     “제레온 경.”

     그랬다면 내 마음이, 이렇게까지 아프지는 않았을 건데.

     왈칵 쏟아지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고 벨져가 제레온을 감싸안고 울음을 터트렸다. 그 자리에 주저앉은 채 한참을 미동도 않던 그가, 자신이 건드려도 아무런 반응도 않는 그 모습이 벨져는 더 서러웠다.

     “이젠.”

     그래서였다.

     “이제는 제가 지켜드리겠습니다.”

     그래서, 벨져는 필사적으로 외쳤다.

     “그러니까 제발.”

     이것이 그의 긍지를 꺾는 일일수도, 해서 되레 악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 그러나 벨져는.

     “무너지지 마십시오, 제레온 경.”

     최소한 그를 잃고 싶지 않았다. 그것이 어릴 적 저가 사모하였던 그 영광스런 모습을 잃은 한낱의 퇴물이라 할지라도.

     자신에게는 영원한 ‘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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